형부와 결혼 한 여자
지금 저는 죽은 언니와 형부 사이에서 낳은 아이에게 마른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철없는 갓난아기는 마치 자신이 빨고 있은 젖이 자기 엄마의 젖인 냥 해맑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더 가관인 것은 금방 고기잡이는 나갔다가 돌아온 형부 아니 지금은 저의 동거남이지만 내년 봄이면 저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제 남편이 될 사람이 저의 빈 젖을 빨면서 철없이 아니 해맑게 웃고 있는 자신과 자기 아내인 우리 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갓난아기 볼을 쓰다듬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갓난아기가 주무르고 있는 저의 젖가슴을 같이 주무르며 어서 갓난아기를 잠을 재우라고 칭얼대고 있답니다.
칭얼대는 이유야 제가 꼭 말을 안 하여도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니 구태여 그 부분은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지금에야 말을 하지만 언니가 형부하고 결혼을 한다고 하였을 때 저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언니는 죽어서도 자신이 먼저 몸을 형부에게 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제가 먼저 형부에게 몸을 주웠기에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형부는 저의 남자였다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한 사실일 것입니다.
형부는 외항선의 삼등항해사였습니다.
형부의 아버지는 만년 기관원으로 외항선을 타셨는데 어의 경우 학교에서 잡일을 하였다는 소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형부 말에 따르면 예전에 학교에서 잡일을 하던 소사의 경우 그의 자녀들이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꿈이었고 희망이었다고 하듯이 만년 기관원으로 기관실에서(기관실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형부에게 들어서 안 것인데 자동차로 치면 엔진에 해당하는 거대한 것을 닦고 조이며 정비를 하는 곳이라고 하였음)햇빛을 구경하지 못 하고 지내다가 쉬는 시간에야 겨우 바다도 보고 햇빛도 볼 정도로 선체의 말미 부근에 근무를 하였기에 형부 아버지 즉 앞으로 저에게 시아버님이 되실 분의 평생소원이 하나 뿐인 아들인 형부가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밑에서부터 천천히 승진하고 또 경력을 쌓은 후 시험을 봐서 외항선 선장이 되기만을 기대하였는데 그만 우리 자매의 덧에 걸려 외항선 선장의 꿈을 접고 지금 남해안의 아주 작은 어촌에서 고기잡이배의 선장이 되고 말았답니다.
그런 이제부터 우리 자매와 형부의 이야기를 모조리 말 하겠습니다.
아니 먼저 우리 아버지 엄마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도 5년 전에 살아 계셨으며 그리고 지금의 형부처럼 고기잡이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5년 전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더니 얼마 안 가서 우리 엄마와 딸인 자매와 선장 잃은 고기잡이배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바다에서 물질을 하시던 엄마마저도 오랜 잠수로 인한 잠수병이 발발하여 아버지를 따라 우리 자매만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우리 자매는 앞날이 막막하였습니다.
우리 자매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오두막에 가까운 집이랑 아버지가 고기잡이에 쓰던 낡은 고깃배 한 척이 우리 자매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저 보다 7살이나 많아 일찍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고기를 잡던 언니가 배를 운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낚시가 잘 되는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오리 동네에서 배로 십 여분 이상을 타고가면 아주 좋은 포인트가 산재한 곳이기에 바다낚시 철이 되면 전국의 많은 강태공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의 경우 배를 타려는 낚시꾼들로 북새통을 이룰 지경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이나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의 경우 고기잡이배들은 고기잡이를 접고 모두가 낚시꾼들을 갯바위로 실어다 주고 또 갯바위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물때에 따라서 다른 갯바위로 이동을 시키고 그리고 낚시가 끝나면 육지인 우리 동네까지 데리고 오는 일의 수입이 고기잡이보다 짭짤하여 그 일에 매달리는데 처녀 선장인 우리 언니의 배는 그런 배들 중에 인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아니 가까운 곳에 백사장이라도 있다면 여름철에도 민박이 가능하겠지만 길이 10M정도의 백사장은커녕 손바닥만한 백사장도 없기에 낚시 철이 아니면 민박 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돌 정도로 민박 손님은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 동네에 낚시 철도 아닌 한 여름인 작년 8월 5일 한 건장한 청년이 우리 동네로 왔고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언니를 찾았고 그리고 우리 언니에게 3주 만 머물면서 낚시도 하고 휴양도 하다 가겠다면서 방을 빌려주고 밥을 해 주기를 부탁하였고 마침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여름방학이지만 그 청년이 끝까지 있겠다는 날이 개학을 한 후까지였지만 언니가 저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묻기에 철이 철인지라 고기잡이도 시원치 않다는 것을 잘 아는 저였기에 승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 아니 형부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처음엔 손님으로 여겼습니다.
언니가 그 청년 아니 형부를 손님으로 받으면서 저에게 신신당부를 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 청년을 남자로 보지 말고 오로지 손님으로만 보라고 그리고 자신도 그러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자만 정말이지 민박 손님은 내가 평소 소원하던 그런 남자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 청년을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외항선의 삼등항해사로서 한 달간의 휴가를 얻어서 휴가를 온 것이 바로 우리 동네였고 그리고 우리 집에서 민박을 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고기잡이배들은 전날 혹은 그 이전에 쳐 둔 그물을 끌어올리는 일을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나가서 조업을 해야 하고 그리고 아침 일찍 항구로 돌아와 위판 장에 위판을 하여야 하기에 언니는 아침 일찍 조업을 나가야 하였고 그 청년이 낚시를 나간다면 함께 배를 타고 나가 갯바위에 실어다 주고는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처음 몇 칠은 언니의 말대로 손님으로만 봤습니다.
하지만 낚시를 나가지 않은 날 하루 전 그만 그 청년을 남자로 보게 되고 말았습니다.
8월 10일 월요일 그날은 그 청년이 낚시를 가지 않고 하루 수겠다고 일요일인 전날 저녁을 먹으면서 언니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대신 누구에게서 들었다면서 우리 동네 뒷산의 경관이 기가 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거기에 오르기로 작정을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는 새벽에 조업을 나갔고 청년하고 단 둘이 남아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그 청년이 같이 안 가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 선뜻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마치 십년지기나 된 것처럼 밥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려하자 제 곁에 나란히 서더니 저랑 같이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벌렁벌렁 해 지더군요.
하지만 진정을 하고 같이 설거지를 마치고 냉장고에 <손님 모시고 길 안내 하고 올게>란 메모를 남기고 저는 거 청년이랑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물론 그 청년은 우리 동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빵과 음료수 그리고 과자부스러기도 사서 가방에 매고 동네를 벗어났답니다.
일 년에 겨우 한 달 남짓 육지를 밟는 다는 사람치고는 정말이지 산을 잘 탔습니다.
일 년 열두 달 365일을 육지에서 사는 저보다 더 말입니다.
뭐라고요?
너무 앞서 가지 마세요.
혹자들은 산에 오르면서 아님 내려오면서 무슨 짓을 하지 않았냐고 상상하시겠지만 그 청년 아니 형부는 제 손도 안 잡았답니다.
한참을 올라 정상에 오르자 그 청년은 저에게 가지고 갔던 빵과 음료수 그리고 과자부스러기들을 저에게 안겨주며 먹으라고 하더니 위험스럽기만 한 바위를 타고 오르더니 진정한 정상인 바위 위에 서더니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아주 낭랑한 목소리를 읊기 시작한 것은 제가 좋아하는 도 종환님의 시들이었습니다.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다 살겠지요,
살다가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바람이 오면: 필자 주)
산이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도 자기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던지 시원하게 불었습니다.
먼 바다도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큰 산으로 가는 길에는 물이 있다.
물은 큰 산을 품어 더욱 깊어지고
산은 물을 따라 내려가 더욱 맑아진다.
마음이 크다는 것은 마음이 깊다는 것이다.
마음이 깊다는 것은 마음이 맑다는 것이다.>(큰 산 가는 길: 필자 주)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은 마치 제가 좋아하는 시를 전부 안기라도 한다는 듯이 바다를 향하여 계속 낭랑하게 낭독하였습니다.
청년 오빠의 청아한 목소리는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었습니다.
오를 수만 있다면 저도 그 청년 오빠가 올라가 있는 바위 위에 나란히 서서 한 소절씩 나누어가며 낭독을 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던 저는 음료수와 과자부스러기를 먹으며 멀리서 그냥 바라보면서 아는 시가 나오면 속으로 같이 낭독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거의 삼 십분 가량을 그렇게 낭독하더니 내려왔고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곁으로 와 앉더니 빵과 과자부스러기와 음료수를 마시면서 바다를 바라보고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청년 오빠에게 마음이 끌렸던지 엄마아빠 이야기며 우리 자매 이야기를 하나도 꾸밈없이 모조리 이야기 하고 말았습니다.
청년 오빠도 자신이 배를 타기 위하여 해양대학에 가게 된 동기를 만들어준 자기 아버지에서부터 시작한 자기의 이야기를 모조리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다음 날도 그 청년 오빠는 낚시를 나갔습니다.
산에 갔다 온 후로 전 막연하게 그 오빠를 동경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 오빠가 바위 위에 올라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낭독하던 모습을 그리며 자위를 하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사실 시골 더구나 바닷가의 외진 학교에 다니는 우리 남녀 학생들 사이에 풍기는 정말이지 문란 할 대로 문란 하였습니다.
물론 도시에서도 일부 학생들의 경우 초등학생들도 빠구리를 한다는 소문을 듣기는 하였지만 제가 알기로 제가 다니던 중학교의 중학생들 중에(제가 다녔을 때)처녀를 그대로 간직한 애들은 없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풍기가 문란하였고 그 와중에는 선생님들도 한 목을 하였답니다.
저의 경우 중학교 2학년 때 가을소풍을 가서 평소 흠모하였던 국사선생님에게 저의 첫 순결을 바쳤거든요.
중학교 올라가면서 전 국사선생님을 처음으로 남자로 느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가가기에는 이미 많은 여학생들과 염문을 뿌리고 있던 국사선생님의 빈틈을 찾기에 어린 저로서는 전혀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눈썰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빈틈을 찾던 저에게 빈틈이 보인 것은 바로 가을소풍 때였고 또 그 장소 역시 다른 곳이 아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집에서 민박을 왔던 오빠하고 같이 올라갔던 바로 그 산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한참 장기자랑이 열을 올리는데 아무 반의 담임도 맡지 않고 있지만 자기 뜻이 아닌 교장선생님의 지시에 의하여 2학년 소풍에 따라온 국사선생님이 슬며시 자리에서 뜨지 뭡니까.
전 알았습니다.
분명히 소변을 보러 간다고 말입니다.
최근에 정장 조금 밑에 공중화장실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없었거든요.
분명히 어디엔가 학생들 내지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가서 바위나 나무를 향하여 좆을 겨누고 오줌을 눈 것임은 저는 짐작하였고 재빨리 국사선생님 뒤를 따라 가서는 국사선생님이 제 예상대로 바지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누기 시작하자 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이 다가가다가는 멈칫 하고 서자 국사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오줌이 나오는 좆을 저에게 보여주었고 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면을 하지 않자 국사선생님은 손짓을 하였고 가까이 다가가자 나직하게 좋아하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떡이자 국사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좆을 바지 안으로 집어넣더니 지퍼를 올리지 않고 제 손을 잡고 숲속으로 한참을 들어갔고 그리고 나무를 짚게 하고 엎드리게 하더니 저의 팬티를 발목까지 내리더니 자신의 혁대를 풀자 올리지 않은 지퍼 덕에 국사선생님의 바지는 주르르 밑으로 흘렀고 그러자 팬티를 내리더니 제 엉덩이를 잡고는 경험이 있느냐고 묻기에 아니라며 도리질을 치자 하연 치아를 들어나며 처음에 많이 아픈 것을 아느냐고 묻기에 이번에는 고개를 끄떡이며 안다는 듯을 표하자 국사선생님은 이를 앙다물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기에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국사선생님의 야구방망이 같은 좆을 제 생살이나 다름이 없는 보지구멍 안으로 무자비하게 침입을 하였고 그리고 저의 처녀를 가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저의 보지구멍은 국사선생님의 좆은 물론이고 몇 몇 남학생들에게 주기도 한 상태였기에 국사선생님하고 직접적인 빠구리를 하기 전만 하여도 보지구멍에다가 무엇인가를 쑤셔 넣고 자위를 하지 아니하고 손바닥으로 보지둔덕을 문지르는 방식의 자위를 하였지만 처녀막이 뚫린 후로는 가급적이면 적어도 손가락을 보지구멍 안에 넣고 자위를 하던지 그도 아니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지나 아님 껍질을 부드럽게 다듬은 오이를 보지구멍에 쑤셔 넣고 자위를 하였습니다
오빠하고 산행을 다녀 온 후 그 대상이 그 청년 오빠가 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흑 오빠”그날도 전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산행 생각을 하였고 그리고 바위 위에 올라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낭독하던 오빠를 떠올리며 파자마를 밑으로 내린 채 팬티 안에 아니 보지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쑤시기를 반복하며 저도 모르게 오빠를 나직하게 외쳤습니다.
“미라야 밥 아니 미리야”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렸고 언니 배를 타고 갯바위로 낚시를 가 있어야 할 민박 손님 오빠의 얼굴이 보이지 뭡니까.
부끄러운 저의 모습을 오빠가 보고 만 것입니다.
“너 자위 하는 구나”오빠가 제 팬티를 제켰습니다.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손가락을 보지구멍에 넣은 채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순간 오빠가 엎드렸고 그리고 저의 보지구멍에서 손가락을 뺐고 그리고 트레이닝바지를 벗으며 정신없이 제 보지를 빨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트레이닝바지와 팬티가 한꺼번에 벗겨지자마자 오빠는 자신의 하체를 제 면전에 주었고 저는 저도 모르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오빠의 좆을 빨면서 흔들었습니다.
민박 손님과 민박집 주인 동생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한 쌍의 동물로 변한 것입니다.
오빠는 저의 보지에서 계속 나오는 한강수나 다름없는 음수를 모조리 빨아먹었고 저 역시 오빠의 좆 물을 모조리 삼켰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정상적인 자세로 빠구리를 하였고 뜨거운 오빠의 좆 물을 저의 보지구멍으로 시원하게 받고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오빠와 저가 하나가 된 것은 오빠가 우리 집에 민박을 시작하고 꼭 8일 만인 8월 13일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중이었고 오빠는 대학을 졸업하고 7년만인 32살 때인 바로 작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저는 언니 몰래 제 스스로 오빠 방을 찾았고 그리고 벌려주었습니다.
저와 동침을 한 사흘 후부터 오빠를 갯바위로 실어다 주면서 선상에서 언니도 그 오빠하고 빠구리를 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말입니다.
언니는 제가 먼저 오빠하고 빠구리를 하였다는 것을 모르면서 또 저 모르게 오빠하고 빠구리를 하면서 저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였고 저 역시 언니가 설마 오빠하고 할 것이란 아니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언니 모르게 오빠하고 빠구리를 한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매가 한 남자의 좆을 번갈아가며 보지구멍에 넣게 하고 빠구리를 즐긴 것입니다.
처음에 오빠하고 아무런 사이가 아닐 때는 날이 가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빠 때문에 자유롭게 친구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오빠하고 빠구리를 시작하고는 하루하루 날짜가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날짜는 아주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아쉬운 3주가 지났고 그리고 오빠는 다시 외항선을 타려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경악케 한 크나큰 사고가 발생하였으니 그건 다른 일이 아니라 평소 꼼꼼하기로 소문이 난 언니가 허술하게도 자신의 일기장을 숨겨둔 책상을 잠그지 않고 고기잡이에 나갔고 전 그만 봐서는 안 될 언니의 일기장을 보고 만 것입니다.
그런 여기서 언니의 일기장 일부를 공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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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5일
우리 집에 때 아닌 민박 손님이 왔다.
너무나 멋진 남자이다.
차림이며 생김새로 보라 뱃일을 하는 나로서는 올려다 볼 상대가 아닌 그런 남자 같다.
미라도 분명하게 나처럼 생각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미라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민박 손님을 남자로 보지 말고 오로지 손님으로만 보라고 그리고 나도 그러겠노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일기를 쓰는 지금도 아랫방에서 혼자 잠들었을 그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미란아 네가 넘볼 남자가 아니다.
정신 차려라!
스스로에게 당부를 해 보지만 펜을 잡지 않은 손은 이미 팬티 안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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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의 일기는 내가 놀랄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도 첫날 그 오빠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였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나와 하나가 되고 난 8월 13일로부터 나흘이 지난 8월17일의 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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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7일
결국 일이 발생을 하고 말았다.
이젠 어쩌란 말인가.
넘봐서는 안 될 사람을 넘보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이는 내가 좋아서 자기가 먼저 넘봤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내가 그 동안 바라도 기다렸던 일이었기에 쉽게 그이에게 몸을 허락하고 만 것이다.
부모에게 승낙을 받아보겠다고 장담을 하였지만 천애고아인 남매가 둘이서 의자하며 작은 통통배로 고기잡이를 하며 지내는 계집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부모님은 이 세상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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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고 난 한 동안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와 먼저 빠구리를 시작하고 언니하고 다음으로 하면서 언니를 애내로 맞아들이겠다는 오빠의 의도는 나의 정신을 잃게 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언니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을 때는 이미 제 눈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눈물 때문에 언니의 일기장이 흐릿하여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하였으니 그 눈물이 언니의 일기장에 떨어졌고 그 흔적은 나중에 저로 하여금 언니에게 저가 언니보다 먼저 오빠하고 빠구리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한 동기가 되었고 언니가 위험을 무릅쓰고 출산을 선택키로 한 이유가 되었으며 출산을 위하여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만약에 자기가 죽으며 태어날 아기와 자기 남편인 형부를 저에게 맡긴다는 부탁의 유언을 남기게 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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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고기잡이를 위하여 들이어 놓은 그물을 끌어올리고 다음 날 아침에 끌어올릴 그물을 치려고 나가는데 민박손님이 갯바위에 자기를 내려놓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8월 5일부터 몇 번이나 그이를 갯바위에 실어다 주었지만 그물을 끌어올리고 넣는 시간이 아닌 시간이면 내 뇌리에서 지어지지 않는 그런 나의 이상형이었기에 한 배에 같이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 따라 그이는 갯바위로 가려하자 그냥 내가 조업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안 되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어쩜 난 그이가 나의 배에 타고 갯바위로 가는 날마다 이 말을 가다렸는지도 모를 말이었기에 순순히 승낙을 하였다.
아니 속으로 고맙게 생각하였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그물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8월 들어 최고의 어획량이 그것을 말하여 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최고의 위판 가를 올렸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이가 보는 앞이라 그런지 오늘부터 잡아도 되는 꽃게까지 나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 정도로 많이 그물에 걸려있었다.
꽃게가 올라오자 그이가 나에게 오며 말을 붙었다.
위성으로 보는 TV에서 일박이일이란 프로그램에서 꽃게 라면을 꼭 한 번만이라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생각만 앞섰지 먹어보지 못 하였다면 배에 혹시 라면이 있다면 자기가 끓여 보겠다며 있으며 말라고 하였다.
배가 갑작스런 풍랑을 만날 경우 어디에 임시로 정박을 하여야 할지 모르는 탓에 어선의 비상식량이나 다름없는 라면이 없을 리가 만무하잖은가.
난 라면 두 봉지를 그이에게 건넸다.
물론 다리가 부러져 상품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진 꽃게도 풍성하게 주고 말이다.
행여 하는 기대감에 부푼 나머지 난 배를 낚시꾼 몇 몇이 보이는 곳에서 그이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천천히 움직여 낚시터에서는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런 위치에서도 불안하여 육지에서 봐서 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정도의 바다까지 나갔다.
거기서 내가 행여나 하는 일이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다.
그이와 냄비와 김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사이좋게 라면을 먹는 도중에 일이 발생을 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고기 그물을 올리는 동안 잠잠하던 바다가 라면과 김치를 가운데 두고 앉자마자 큰 파도가 뱃전을 때렸고 그리고 내가 선체의 흔들림에 몸이 쓰러지려하자 그이가 내 몸을 잡아준다고 잡은 것이 그만 한 손으로는 내 팔을 잡았지만 나머지 한 손이 그만 나의 젖가슴을 잡아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바다가 잠자하여졌지만 냉랭한 분위기로 겨우 라면을 먹고 냄비와 김치 통을 들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뱃전을 파도가 강하게 때렸고 뒤뚱거리는 내 몸을 그이가 잡았고 이번에는 바로 잡았으나 조금 전에 젖가슴을 잡은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기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데 그이가 와락 날 끌어안았고 끌어안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이 품에 안기자 그이가 냄비와 김치 통을 앗듯이 앗아 한쪽으로 치우고는 나를 선창에 눕혔고 그리고 비닐 방수복을 벗기더니 내 몸에 올라와 키스세례를 퍼부으며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기다렸던 일인지도 모를 그이의 그런 행동이었지만 엄청 불안한 무언가가 엄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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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었지만 당시엔 언니가 생각한 불안한 무언가가의 정체를 난 몰랐다.
오로지 내 남자를 빼앗아간 언니가 미웠고 그리고 언니의 동생인 나와 먼저 빠구리를 하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언니하고도 양다리를 걸쳐가며 빠구리를 하였는지 모른다는 배신감에 몸서리를 치기만 하였다.